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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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아들 새끼
오랜만에 받아보는 레터의 제목치고는 다소 과격한 제목이기는 하지만, 나의 정체성을 묘사하는데 이보다 더 적합한 단어가 있을까 싶어 선정한 단어다. 우리 아버지로 말할 것 같으면 (구) 목사님 (현) 선교사님 되시겠다. 이런 아버지를 둔 나의 역할은 목사 아들. 국회의원 아들이나 연예인 아들같이, 특정한 직업군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는 묘한 인상과 기대감이 있기 마련이다. 목사 역시 그런 직업군에 속하는 사람 중 하나기도 하고.
어딜 가든 목사 아들이라는 걸 밝히는 순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있다. 고분고분하고, 성실하고, 먼지 한 톨 없는 정직한 삶을 살아온 아이. 그리고 난 그런 아이가 되기 싫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기대감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목사님 아들이라 착하다, 성실하다, 남다르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의 청개구리가 울기 시작한다. 개굴.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개굴. 진짜 내가 누군지 보여줘? 개굴. 다행히 일상에서 청개구리가 친히 직접 나서는 순간은 별로 없지만, 이런 말들을 들을 때면 청개구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배를 잔뜩 부풀리고 시끄러운 울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개굴 개굴.
일요일 아침. 청개구리는 남이 시키는 것은 절대 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마다 꼬깃꼬깃 손에 쥐여주시던 1,000원 짜리 2장은 헌금함이 아닌 동네 피시방으로 향했다. 홀리한 찬송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교회가 아닌 총소리와 고함소리, 매캐한 담배냄새가 난무하는 피시방으로 향했을 때. 아마 그때가 청개구리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니, 생각해 보면 청개구리의 전성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마음속에 티격태격하는 늑대 두 마리를 품고 산다는 인디언 전설처럼, 이 청개구리는 마음 한구석 바닥에 우두커니 앉아 내가 주는 먹잇감을 기다리곤 한다. 언제든지 그 욕심으로 가득한 치렁치렁한 배를 잔뜩 부풀릴 준비를 하면서.
이 개구리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는 생각보다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정보다는 '안심'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어쩌면 나만 이 축축한 개구리를 달고 사는 건 아닐까, 온몸을 짓누를듯 무거웠던 이 마음은 <사바하>라는 영화를 통해 조금은 가벼워졌다.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를 여기에 옮겨 적을 수는 없겠지만, 영화의 요는 이렇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래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믿음의 맑은 호수에, 뿌옇게 의심이 섞인 이 마음을. 오늘도 여전히 개구리는 운다. 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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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욕의 미학
어쩌다 보니 이번 뉴스레터에 실린 글들의 제목이 죄다 걸걸하다. 욕을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종종 활용하기도 한다. 최대한 포장했지만 그냥 뭐, 내 기분이 안 좋으면 욕을 달고 산다는 의미다. 물론 입 밖으로 욕을 절대 뱉진 않지만. 아, 가끔씩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피식피식 새어 나가는 순간도 있는 것 같긴 하다.
왜 욕을 하는가?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답이 정해져 있는 듯한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내려보기로 했다. 우선 욕을 하면 즐겁다. 욕은 격식이 없다. 격식이라는 건 일종의 사회가 정해놓은 테두리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테두리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사는 재미는 조금 떨어질 뿐. 내 기준에 욕설은 그 테두리를 파괴..까지는 아니고 아주 조금 흐릿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선과 선을 미묘하게 살살 건드리는, 최소한의 일탈 같은 거. 그래서 욕설에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금지된 것을 해내고야 말았을 때 밀려오는 짜릿함, 길티 플레저와 비슷한 작동 원리가 아닐까 싶다. 누구나 곤드레밥 대신 마라탕이 먼저 당기는 것처럼.
물론 사람은 삼시세끼 마라탕으로만 먹고 살 순 없다. 햄버거를 두 개나 집어 먹고 나서도 여전히 배고픔이 고여있는 건, 당신의 위장이 비대해서가 아닌 마음이 허해서다. 결국 인간은 슴슴한 나물 반찬을 찾게 되어 있다. 그러나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욕을 줄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느덧 30대를 바라보는 내 나이와 그에 비례하게 점점 커져가는 사회적 책임 때문이었다. 칠순 잔치에서 잘 차려진 잔칫상을 보고,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지 않은가. '와, 개 맛있겠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어쨌거나 차츰차츰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남들의 기대와는 조금은 다를 수 있는, '나름'의 어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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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어두운 이야기.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야기
오 그대여 부서지지마 바람새는 창틀에 넌 추워지지마 이리와 나를 꼭 안자 오늘을 살아내고 우리 내일로 가자
난춘(亂春) / 새소년
봄은 사람이 가장 많이 자살하는 계절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명의 탄생으로 대두되는, 봄이라는 대표적인 계절의 어두운 이면을 남몰래 들여다본 것만 같아서. 바람 한 점에도 땅바닥으로 홀홀히 떨어지는 벚꽃잎에서, 사람들의 발에 밟혀 찢기고 더럽혀진 꽃잎들에서, 어쩌면 우리는 죽음의 한 면을 항상 목격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우리가 숨을 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태어나고, 또 누군가가 죽는다. 모든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고, 모든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애석하게도, 불가능하다는 소리다. 어라, 갑자기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누군가의 삶을,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난 날로 매년 기억한다니. 이렇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문득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3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다. 이 시간만 되면 죽음에 대한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도, 죽음과 가장 맞닿은 시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내 사망원인은 내 손으로 직접 정하고 싶다. 하얀 석면 가루가 잔뜩 껴있는 천장만 30분간 바라보다가 죽는 삶은 사양하고 싶다. 그렇다고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하자며, 시답잖은 말로 오늘의 케케묵은 하루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살아있는 것도, 죽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한 가지 팁을 남기자면, 살아야 하는 이유는 최대한 사소하고 별볼일 없게, 죽어야 하는 이유는 최대한 건설적이고 크게 잡는 편이 낫다.
하루 더 살아가는 이유가 고작 엽떡 한 통 때문이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삶을 이어 나갈 용기를 얻겠는가. 그와 반대로, 적어도 우리의 죽음의 이유 뒤에는 타노스로부터 지구를 구한 아이언맨 정도의 서사는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내 죽음의 이유가 지구의 인구 반을 몰살하려고 하는 외계인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이라면, 기꺼이 석면 가루가 잔뜩 껴있는 천장을 두 시간이고 봐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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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잘 쉬다 가셨나요?
쉬려고 했다가 괜히 기운만 빠지셨다면 여기에 적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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