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
비 오는 날 읽기 좋은 글
장마철이다. 굳이 글로 장황하게 써놓지 않아도, 창문 밖만 슬쩍 내다보면 금세 알 수 있다.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필리핀에서 5년 넘게 산 나조차도 여름은 질색이다. 보일러는 아무리 추운 겨울이더라도 어떻게든 아끼고 아껴서 버티지만, 여름에는 한 치의 타협도 없다. 집에 돌아오면 순식간에 책상 위에 올려둔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곧바로 18도로 최대 냉방을 가동한다. 서늘한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세상에 아무리 미운 사람도, 마음에 드는 구석은 하나씩 있듯이 이렇게 더운 여름에도 좋아하는 것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바로 비다. 물론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가 따른다. 실외가 아닌, 실내에서 가만히 내리는 비를 지켜보는 것. 제아무리 폭우가 쏟아져 양말과 신발이 모두 축축해지는 장마라도 실내에서는 전혀 끄떡없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서 빗방울로 조금씩 젖어가는 유리창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평온해진다.
비를 맞는 건 그렇게 싫은데, 실내에서 구경하는 비는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고민을 해봤다. 우선 처음으로 내린 결론은 안정감이다. 아무리 무서운 공포영화를 보더라도 결국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고, 나의 현실은 이렇지 않다는 걸 알기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장마도 똑같다. 빗방울이 아무리 유리창을 두들겨봐야, 그 정도의 세기로는 이중창의 두터운 장벽을 넘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안심이 된다.
비가 좋은 두 번째 이유는 소리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비 내리는 소리는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와 닮아있다. 일반적으로는 파전이나 김치전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상상력을 조금 더 보태 치킨이나 탕수육 같은 좀 더 고칼로리의 음식을 떠올리는 편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파전집이 그렇게 붐비는 데는 다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아닙니다.)
정신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모든 잡생각이 사라진다. 이 순간만큼은 밀려있는 집안일도, 개인적인 고민거리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다. '불멍'이나 '물멍'이 유행하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가끔씩 아무런 목적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소일거리가 필요하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이런 현대인의 니즈를 파악한듯한 영상들이 자주 보인다.
OSV나 ASMR.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했던 단어들이 이제는 대충 그 의미가 이해는 간다. 참고로 OSV는 Oddly Satisfying Video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ASMR은 아직도 무슨 약자인지 모르겠다. 아시는 분이 계시다면 알려주세요. 물멍이나, OSV나 이름만 다를 뿐 그 목적은 똑같다. 항상 무언가에 몰두해 있느라 바짝 긴장해 있는 우리의 뇌를 쉬게 만드는 것. 어쩌면 과거 조선시대에도, 시대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석기시대에도 한 명의 원시인은 동굴 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보며 한껏 센치함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지금 내리는 비가 괜히 특별해 보인다..는 생각도 잠시, 아직도 마르지 않아 꿉꿉한 채로 널려있는 빨래가 눈에 들어왔다. 이래서 여름을 좋아할 수가 없다. 향후 과학이 발전한다면 습도가 없는 비가 내릴 수 있게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그런 비는 내릴 수가 없기에 현대 과학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았다. 대단한건 아니고, 물먹는 하마를 옷장 구석에 하나씩 새로 들여놓았다.
갑자기 보기만 해도 믿음직하게 생긴 하마 마스코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왜 하필 물먹는 코끼리나, 기린이 아닌 하마일까 잠시 고민했다. 하마가 물을 많이 먹나 싶기도 하고, 하긴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를 보면 하마들은 항상 강가에서 코만 내밀고 수영을 즐기는 것 같긴 했다. 이렇게 에어컨과 가습기를 두면 올해의 여름 나기는 이걸로 끝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처음 맞는 여름이라 더 걱정이 되기도 한다. 물가가 그렇게 올랐다는데 전기세 폭탄을 맞지는 않을지, 혹시나 빨래에 곰팡이가 피지는 않을지. 일단은 걱정은 미뤄두고 밀린 글부터 쓰고 있는 중이다.
아, 이번 코너의 제목은 에픽하이의 노래에서 따왔다. <비가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에픽하이 형님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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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도태되는 건 아닐까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있냐는 질문만큼 어려운 질문이 바로 좋아하는 작가가 있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다. 서점에 가는 건 좋아하지만, 서점 한구석에 앉아서 책 한 권을 독파할 정도의 독서광은 아니다. 오히려 나에게 책은 레퍼런스의 한 종류다. '이 사람은 이런 단어를 쓰는구나, 이 문장은 좀 참신한데?' 정도로만 쓰이지, 책을 쌓아두고 읽지는 않는다.
일단 좋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다. 뭐 이 정도는 너무 유명하고 진부한 수준의 답변이라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에 좋아하게 된 글은 박찬용 에디터의 글이다. 박찬용 님이 쓰고 계신 요기레터와 앤초비 북클럽의 애독자라고 혼자 마음속으로만 외치고 있다. 요기레터는 요기요와 박찬용 에디터의 협업으로 만드는 브랜디드 콘텐츠다. 앤초비 북 클럽은 박찬용 에디터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뉴스레터라 그분의 생각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어서 챙겨보는 편이다. 책을 잘 읽지 않는 나에게 제발 책 좀 읽어보는 건 어떨까?라고 착하게 권유해주는 선생님 같은 레터이기도하다.
그날도 어김없이 점심을 먹고 멍하니 '박찬용 에디터' 이름으로 보내온 뉴스레터를 확인했다. 순간 '나는 아무 의미 없는 걸 지키려는걸까?'라는 제목에 정신이 확 들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군도에는 고래잡이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부족들이 있다. 고래를 한 마리 잡으면 부족 전체가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다. 그렇게 몇 천년을 살아온 부족에게 현대사회의 문명화가 찾아온다. 박찬용 에디터가 이번 뉴스레터에서 소개한 <마지막 고래잡이>라는 책의 내용이다.
그래, 정말 어쩌면 나는 미래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라질 일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닐까?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작가는 멸종 위기종이다. 아직까지는 그 속도가 더디지만 분명 언젠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발 그 멸종이 부디 내 일생에서는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적어도 쓰고자 하는 마음과 펜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다른 일보다 훨씬 더 엄격한 평가 기준이 따른다는 말이기도 하다. 세상 당연한 이치다. 잘 아는 축구를 볼 때면 저마다 축구 감독이라도 빙의된 듯 한마디씩 거들게 되지만, 룰을 잘 알지도 못하는 컬링을 볼 때면 "영미!"라고 외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서점을 가면 슬쩍 슬쩍 책 몇 편을 들여다보며 '이 정도는 나도 쓰겠는데?'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절대. 그렇게 못 쓴다. 써 봐서 안다.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에서는 회사를 때려 치고 작가로 잘만 먹고살던데? 그건 드라마의 주인공이니까 가능하지, 우리 집에서만 슈퍼스타인 나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에 비유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영화를 보는 것은 정말 쉽다. 편안한 의자에 기대앉아서 다리도 꼬고, 딴짓도 하다 보면 영화는 금세 끝나있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일은 차원이 다르다. 연영과를 재학 중인 친한 지인 덕분에 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고스란히 접게 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돈이다. 결국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영화가 그나마 글보다 나은 점은, 그래도 글쓰기에 비해 그 수고스러움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아직도 글을 쓰는 게 단순히 펜대를 굴리는 일인 줄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래서 참 곤란하다. 누군가는 멋있는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고, 누군가는 첨단 기술을 활용한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멍하니 화면을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일뿐이다. 나도 놀고 있는 게 아니라고,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괜히 혼자 찔려서 키보드를 더 세게 두드리기도 한다.
다행히 글을 쓰는 일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재밌다. 그래봤자 남는 것은 흰 화면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검은 글자들 밖에 없지만 내게는 이 글자들이 하나의 예술작품과 다름없다.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작가라는 일은 이래저래 참 눈치를 많이 볼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많이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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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기요한
어쩌다보니 레터마다 음식 이야기가 빠지질 않는다. 사실 그렇게 음식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음식의 맛도 잘 모른다. 어떤 게 맛있는 음식이고, 어떤 게 맛없는 음식인지 구별도 잘 안 간다. 음식을 평가하는데 다양한 기준들이 있다면 내 우선순위는 '가성비'다. 다른 거 다 필요 없고, 돈가스나 제육볶음처럼 가성비가 좋은 음식이 최고다.
이렇게 음식에 관심이 없다는 게 때로는 축복이 되기도 한다. 오히려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맛집을 만나면 감동이 두 배가 된다. 특히 그 맛집이 예상치 못한 경우라면 더더욱. 기요한과의 만남도 그랬다. 합정역에는 유명한 맛집이 하나 있다 (고 들었다.) 맛집에 관심도 없으니 자발적인 만남이 아닌, 타인이 주선한 소개팅에 가까운 만남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는 카이센동'. 1차원적인 가게 소개 문구에 피식해 버렸다. 아, 자존심 상해. 일식 요리 이름들은 낯선듯하면서도, 그 의미를 알고 보면 매우 직관적이다. 가츠동 = 가츠를 얹은 덮밥. 결국 돈가스 덮밥이라는 얘기다. 텐동도 튀김을 얹은 덮밥, 카이센동도 해물을 얹은 덮밥. 음식 이름은 역시 이렇게 직관적이어야 이해가 빠르다.
기요한에 도착하자 가게 외부에 나란히 줄 서있는 대기용 의자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역시 맛집은 맛집인가. 어느 순간부터 식당에 줄을 서서 밥을 먹는 게 일반적인 것이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우리 차례에는 줄이 별로 길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웨이팅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음식을 내놓으려고 이렇게 줄까지 서게 만드는거야?라며 안 그래도 삐뚤어진 심보를 더더욱 삐뚤게 만든다.
기요한의 내부는 일드 <심야 식당>에서 자주 보던 풍경 같았다. 실제로는 한 번도 <심야 식당>을 본 적이 없지만. 가게 한가운데에 음식을 만드는 주방이 있고, 그 주방 주위로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손님의 입장에서는 지루한 기다림을 덜어줄 나름의 볼거리가 생긴 것이지만,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역시 뭐든지 손님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 속이 편하다.
땅콩소스와 곁들여서 나오는 회 몇 점을 에파타이저로 먹고 있다보면 밥 한 공기가 식탁에 자리 잡는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첫 카이센동. 특별히 특상으로 시킨 카이센동에는 딱 보기에도 뭐가 많이 추가되어 있었다. 넉넉하게 쌓인 게살 사이로 빨간 알이 반짝거린다. 별 기대감 없이 한 술을 떠봤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해물의 신선함이 가득하다. 식상하지만 정말 한 입을 먹는 순간 딱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신선함을 맛으로 만들면 이런 맛이구나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맛있다..'라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자극적이고 인공적인 맛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자연의 농도 100%의 맛이다. 밥을 어느 정도 먹고 나면 따뜻한 육수를 밥에 부어주신다. 은은하면서도 강하게 압축된 해물의 맛이 입안 곳곳을 마구 침범한다. 왜 이제야 이 음식을 먹어보게 됐을까.
음식과 오디오는 무조건 비싼 게 좋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이제 이해가 간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이 음식을 먹는지, 눈물 나게 맛있는 카이센동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숨겨둔 복선이 하나둘씩 풀렸다. 그날 이후로 맛집이라는 것을 조금은 납득하게 됐다. 그리고 음식이, 먹는다는 본능적인 행위 자체가 우리의 삶에 꽤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이해가 됐다.
아직도 음식이 맛있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간다는 사람이 있다면 꼭 두 손을 붙잡고 기요한의 카이센동을 손수 먹여주고 싶다. 우물에 사는 개구리한테 바다의 광대함을 말해봐야 아무 소용 없듯이, 음식은 먹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다. 인생이 조금 지칠 때, 음식에게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변함없이 기요한을 찾는다. 1만 5천원의 가격으로 잠시나마 인생의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진정한 가성비가 아닌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한번 기요한을 찾았다. 여전히 카이센동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
알바왕
어디 가서 자랑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알바를 꽤나 다양하게 해 본 편이다. 카페에서 2개월 (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 서점에서 3개월 (이 역시 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세계간식할인점에서 5개월, 기능성 슬리퍼를 파는 팝업스토어에서는 캐셔로 3개월. 장기뿐만 아니라 단기로도 화려한 경력이다. 대학교 기숙사 이불걷기, 영어 말하기 대회 스태프, 행사 스태프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뭐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싶다. 그리고 그 때 모아뒀던 돈을 주식에 넣어두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이미 부질없는 일이다.
꽤나 오랜 시간과 경험을 들인 일들이지만 결국 알바는 알바다. 어디까지나 원티드나 사람인이 아닌, 알바천국 이력서에나 들어갈 수 있는 경력들이지만 그래도 나름 자랑스러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첫 알바, 백화점 팝업스토에서 기능성 슬리퍼를 팔았던 일이다. 몇 시간씩 신고 있어도 허리가 전혀 아프지 않다던 그 슬리퍼를 신고 나는 하루에 8시간씩 서서 근무했다. 허리는? 당연히 아팠다. 몇 시간씩 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어딨어.
서서 일하는 것의 장점은.. 없다. 힘들고, 눈치도 보이고, 무엇보다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막 들어온 나는 초면에 한국말이 어눌하시네요?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세상에. 그래도 나름 외국물 좀 먹은 것 같아 보여 이상하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서서 일하는 것도,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슬리퍼의 기능과 효능을 설명하고 판매까지 해야 하는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얼굴색과는 전혀 맞지 않는 빨간색의 반팔 티셔츠를 입고 근무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필리핀의 햇살을 원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비주얼이었다.
경험상 뭐든지 처음 해보는 일은 딱 첫 일주일이 제일 재밌다. 일주일이 지나면 처음의 설렘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슬리퍼를 팔던 지난날들의 노력들이 무색하게, 알바를 하러 가는 시간은 인고의 시간으로 변해있었다. 원래 팝업스토어, 특히 백화점 내부에 위치한 팝업스토어의 생명은 정말 짧다. 여기서 또 자본주의의 냉혹한 교훈이 기다리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 팝업스토어는 언제든지 철수할 준비를 해야 한다. 팝업스토어가 철수하면? 나는 하루아침에 또 다시 백수 신세가 되어버린다.
슬리퍼를 하나씩 팔 때마다 우리는 바코드 스티커를 떼서 노트에 붙이곤 했다. 그렇게 모인 스티커들은 그날의 매출을 알 수있는 훌륭항 성과 지표이자, 개인의 세일즈 역량을 평가할 수 있는 냉정한 꼬리표와 마찬가지였다. 역시 인생은 실전이다. 시장의 냉정한 논리를 반박할 수 있는 변명은 아무것도 없다. 슬슬 '오늘은 얼마나 팔았냐'는 사장님의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이 부담으로 다가왔고, 가끔씩 마주치는 백화점 관계자들에게서는 은근한 압박의 시선이 느껴졌다. 결국 내가 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우리 팝업 스토어는 백화점으로부터 철수 통보를 받게됐다. 다시 말해 내 알바자리가 사라질 예정이라는 뜻이었다.
여느 떄와 다름없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슬리퍼를 팔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고민하던 어느 날이었다. 멀끔한 양복에 번쩍이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척 보기에도 높아보이시는 백화점 관계자가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고 있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는 바로 앞 의류 매장에서 휴지 몇 장을 빌려갔다. 그의 휴지가 향한 곳은 화장실도, 자신의 옷이나 신발이 아닌 에스컬레이터 바닥에 누군가가 흘리고 간 음료수 얼룩이었다. 무릎까지 꿇은 채 그는 바닥을 깨끗하게 치우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순간 멍해졌다. 어쩌면 그의 부하직원을 불러 시킬 수도 있고, 매장 주변 관리를 소홀히 했다며 나에게 문책을 할 수도 있던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진정한 권력이나 리더십은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가장 낮은 곳에서 조용하게 임하는 것. 그 하나의 사건으로 나는 3개월의 알바보다 더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
오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잘 쉬다 가셨나요? 쉬려고 했다가 괜히 기운만 빠지셨다면 여기에 적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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