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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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올 팍이라는 아티스트
세상은 넓고, 예술가들은 많다. 대중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이는 외딴섬 한가운데에 '지올 팍'이라는 아티스트가 살고 있다. 지올 팍의 나라는 조금 이상하다. 이 이상한 나라에서는 이상한 것이 특별함의 기준이 된다. 지올 팍이 만들어내는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을 말하는데 개인의 취향을 빼놓고 논하기 어렵지만, 나름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나의 선택을 받은 걸로 봐선 어느 정도 대중성이 있는 아티스트라는 점은 확실하다. 지올 팍이 만드는 음악의 파동은 힘이 세다. 무하마드 알리처럼 안면에 대놓고 어퍼컷을 날리는 힘이 아닌, 신나게 두들겨 맞다가 조금 있으면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북두신권' 같은 힘이다.
지올 팍을 발견한 곳은 '딩고'라는 유튜브 채널의 콘텐츠 중 하나인 '라이징 벌스'에서였다. 간판 콘텐츠인 킬링 벌스가 이미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아티스트들이 기량을 마음껏 뽐내는 곳이라면, 라이징 벌스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필요한 신예 아티스트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는 곳이다. 어느새 딩고가 만드는 콘텐츠는 문화가 되어있다. 지올 팍을 래퍼가 아닌 굳이 '아티스트'라 일컫는 이유는 그를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로 규정하기엔 그가 가진 재능이 너무 남달라서다. 이미 스스로를 '아트 디렉터'로 소개할 정도로 그의 분야는 음악에만 그쳐있지 않다. 글도 쓰고, 영상도 만들고, 음악도 한다. 이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방식들을 사용해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리고 있다. 이런 천재성은 지올 팍이 만드는 음악 곳곳에 묻어난다.
사실 지올 팍은 예술가가 아닌 사업가가 될 계획이었다. 컴퓨터에 빠져 지내던 10대를 지나 20대 초반에는 미국에 음악 스타트업을 차리기 위해 실리콘 밸리로 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내주기로 한 기획서가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기획서를 보내주기로한 두 친구 중 한 명은 잠수를 탄 상태였다. 사업가 지올 팍의 마지막이자, 예술가 지올 팍의 시작이 되는 순간이었다. 역시 천재성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휘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의 성공 스토리이기도 하다.
지올 팍의 가장 큰 강점은 '목소리'다. 가수에게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무기. 그런 점에서 지올 팍의 목소리는 묘한 불쾌함과 만족감 그 사이 어딘가를 치밀하게 꾸물거리는 매력이 강점인 무기다. 지올 팍은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사운드, 새로운 사운드를 끊임없이 추구하는 까다로운 리스너들의 자비 없는 엄지손가락을 멈칫하게 만든다. 식상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지올 팍의 장르는 지올 팍이다. 위태롭게 느껴지는 지올 팍의 하이 톤의 보컬과 팀 버튼 영화의 한 장면을 청각화 시킨 듯한 사운드가 쉴 틈 없이 이어진다. 지올 팍은 이 노래 속에서 때로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한 명의 화자로서, 때로는 아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노래한다. 'Modern Fox'라는 곡이 그렇다.
'I lost my wild. Feel like home dogs.'
난 야생성을 잃어버렸죠. 이제는 애완견이 되어버린 것만 같아요.
남들이 하는 대로 쫓아가다 개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을 야생성을 잃은 여우에 비유하다니! 이거다 싶었다. 그 뒤로 지올 팍의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내 플레이리스트에 실린 곡은 'Ghost'라는 노래다. 멜로디도 이해하기 쉽고, 지올 팍 특유의 음산한 분위기와 노래가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곡이다. 참고로 지올 팍의 노래는 모두 영어다. 그래서 곡의 낯선 분위기가 더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한국어로 된 노래와 다르게, 영어로 된 노래는 그 의미를 곱씹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일부러 그런 점까지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올 팍의 노래는 한 번 듣고 마는 인기 차트의 노래들이 아닌, 잊을만하면 다시 돌아오게 만드는 잔잔한 예술 작품과도 같다.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것을 해낸다는 것. 아티스트에게는 그런 고집이 필요한 것 같다. 앞으로 세상에 이런 아티스트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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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먹을 음식: 떡볶이
엄지 분식과 학교 앞 분식.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앞에는 두 분식집이 있었다. 엄지 분식은 말 그대로 엄지처럼 작지만 쉽게 굽히지 않는 강직한 맛이 일품인 곳이었고, 학교 앞 분식은 이름 그대로 학교 앞에 있는 곳이었다. '학교 앞'이라는 상권을 선점한 지리적 조건과 '맛'이라는 음식점의 기본적인 조건의 대결.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초등학생들은 두 분식집 모두의 손을 들어줬다. 그때의 시장 경쟁에는 복잡한 경제 논리를 뛰어넘은 어떤 낭만이 있었다.
굳이 초등학교 시절 얘기까지 꺼낸 이유는 바로 오늘 이야기 할 음식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학교 앞 분식집으로 미각을 단련한 한국의 성인들은 이제 웬만한 떡볶이에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 찍먹과 부먹, 아아와 뜨아 등등. 음식 하면 떠오르는 그 유명한 난제들에,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밀떡 VS 쌀떡'이 들어가 있는 것만 봐도 이 나라에서 떡볶이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감히 소울푸드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떡볶이가 있다. 물론 소울푸드의 왕좌에 앉기까지 '맛이 없는 음식'이다는 오명부터, 여러 가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지만 이제 떡볶이는 누가 뭐래도 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음식인 것은 확실하다. 오죽하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다는 책까지 나왔을까. 어린 시절 추억으로만 끝났을 뻔한 떡볶이는 바쁜 현대 사회 속에서도 변화의 흐름에 누구보다 가볍게 적응하며 살아남는 중이다. 짜장 떡볶이부터 로제 떡볶이까지, 떡볶이의 변신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음식들에 비해 소스 하나만 바꾸면 된다는 간편한 점 덕분이기도 하다.
누구나 만들기는 쉽지만, 재료들의 미묘한 비율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라 똑같은 맛을 내기 어렵다는 것도 떡볶이만의 특징이다. 이제는 프랜차이즈의 떡볶이집의 간판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내 입맛에 맞는 떡볶이를 찾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이유기도 하다. 내가 찾은 인생 떡볶이는 떡볶이의 메카인 신당동도, 대형 프랜차이즈도 아닌 역삼역에 위치한 작은 분식 집이다. <김밥친구들>이라는 텍스트가 흐물흐물한 글씨체로 쓰여진 간판이 인상적인 이곳은, 맛만큼은 결코 흐물흐물하지 않다.
이 곳의 떡볶이는 다른 곳에 비하면 눈에 띄게 평범하다. 후추를 넣어서 자극적인 맛을 더 한다든지, 다른 곳에는 없는 비법 소스를 쓴다든지 하는 숨겨진 레시피는 없다. 딱 어렸을 때 한 번쯤 먹어본 적당히 맵고, 적당히 짭짤하고, 또 적당히 달달한 맛이다. 쉽게 말해 개성이 없다는 점인데, 오히려 그게 더 매력 포인트다. 자극적인 맛이 없는 덕분에 물리지 않고, 부담 없이 가볍게 술술 들어간다. 항상 2인분을 사들고 오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3인분 정도는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맛이다. 게다가 가격도 1인분에 3천 원, 예전 추억의 가격 그대로다. 퇴근 후에 무거워진 발걸음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어주는 일등공신은 바로 이 가게의 떡볶이다. 밥은 먹기 싫고, 그래도 든든하게 무언가로 허기진 텅 빈 위장을 채워 넣고 싶을 때면 항상 이 가게를 찾는다.
누군가에게는 퇴근 후 시원하게 맥주 한 캔을 들이켜는 것이 낙이라면, 나에게는 이 가게에서 떡볶이 2인분을 포장해 쿨피스와 같이 먹는 것이 낙이다. 배도 부르고, 노트북에는 재밌는 예능이 흘러나오고, 에어컨에서 시원한 바람이 솔솔 나오는 걸 느끼다 보면 그날 하루도 어찌저찌 마무리됐다는 안심이 든다. 괜히 소울 푸드라는 타이틀을 붙인 게 아니다. 떡볶이를 먹는 이 순간만큼은 모두들 각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 세상 이렇게 공평한 음식이 따로 있을까. 과장 조금 해서 떡볶이 때문에 타임머신의 발명이 늦어지고 있지는 않을까.
치킨 값이 슬그머니 2만 원을 넘기고, 떡볶이도 점점 프랜차이즈화 돼가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떡볶이만큼은 추억의 그 가격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사소한 바람이 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새롭고 맛있는 음식이 나와도, 결국 우리는 모두 다시 떡볶이를 찾을 테니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지난 13년 만에 라면 값을 인상한 오뚜기가 새삼 대단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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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과 일본인이 필리핀에서 영어로 말하기
필리핀에는 야자가 없다고 했다. 그거 하나면 내가 필리핀에 따라갈 이유는 충분했다. 그렇게 한국에서만 17년을 넘게 산 우리 가족은 하루아침에 필리핀에서 살게 됐다.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이렇게 현실로 일어날 줄은 몰랐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목사였던 아버지는 '선교'라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자,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윈윈의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필리핀으로 향했다.
필리핀의 첫인상은, 일단 더웠다. 비교적 약한 한국의 햇살에 적응해 있었던 내 피부는 심상치 않은 변화를 눈치라도 챈 듯 땀샘에서 흥건하게 땀을 뿜어냈다. 날씨가 더우니 일단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 했다. 우리 (나와 내 동생)가 해야 하는 일은 기숙학원에서 3개월 동안 영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필리핀에는 야자가 없는 대신,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했다. 기숙학원의 첫인상은 감옥이었다. 비유가 아니라 학원 바로 옆에는 공사를 하다 만 빈 공터가 있었고, 주말에만 외출이 가능한 학원의 정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정문 옆에는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가드들이 서 있었다. 학원 마당에는 누군가가 시멘트 바닥에 페인트 칠로 대충 그린 농구 코트와, 농구공과 색깔과 크기만 비슷한 탱탱볼들이 구석에 쌓여 있었다. 정말 영화에서 보면 싸움판이 벌어지고, 온갖 암투가 일어나는 운동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학원 내부 기숙사는 이미 인원이 가득 차 있어서 나는 외부 기숙사로 배정됐다. 외부 기숙사는 그나마 조금 나았다. 2층짜리 가정집에 6명 정도의 인원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내 방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한국인 두 명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보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곳에서 어떻게 3개월을 버티지. 모태 I인 내가 낯선 사람들과 한 방에서, 그것도 3개월 내내 같이 먹고 자본 경험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필리핀이라는 머나먼 타국에서 단체생활을 한다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학원 문밖을 조금만 나가도 어색한 풍경이 펼쳐지는 이곳에서의 생활도 꾸역꾸역 적응해 나갈 시기였다.
밖에는 비가 솟구치듯 내리고 있었고, 배는 꺼질 듯이 고팠다. 날씨가 더워 입맛이 없어 저녁을 부실하게 먹은 게 원인이었다. 외부 기숙사에는 아무도 없는 듯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2층에서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냉장고를 향했다. 냉장고에는 기숙사에서 같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의 음식들로 가득했다. 이름 모를 수많은 간식거리 사이로 마시멜로우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왜 하필 마시멜로우였는지는 모르겠다. 웃긴 건 나는 마시멜로우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다.
마음 속 악마가 스멀스멀 속삭이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식탐이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그 식탐이 하필 지금,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그것도 남의 음식 앞에서 깨어났다는 게 문제였다. 냉장고 문을 몇 번이고 열고 닫기를 반복하다, 이대로라면 완전범죄가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집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고, 냉장고에는 누가 먹어도 모를 정도로 음식이 가득했다. 머릿속에서 이미 재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려본 악마는 뾰족한 삼지창으로 옆구리를 쿡쿡 쑤셔대고 있었다.
결국 마시멜로를 우걱우걱 입에 쑤셔 넣었다. 아마 그 유명한 마시멜로우 테스트에 내가 참여했다면 나는 가장 참을성 없고, 가장 실패할 확률이 높을 아이로 역사에 기록됐을 것이다. 행여나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허겁지겁, 추하게 마시멜로우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허기를 달랜 악마는 만족한 듯 배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됐고, 생각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 정도가 지났을쯤, 사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다행히 한 일본인 친구와 조금 친해져서 인사 정도 건네는 사이가 됐을 때, 갑자기 그 친구가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Did you eat marshmallow?"
이미 마시멜로우는 기억 저 머나먼 곳으로 사라졌는지, 순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멀뚱멀뚱 그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제서야 입속에 와구와구 집어넣었던 바로 그 마시멜로우가 생각났다. 그 와중에 내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은, 이 친구가 그걸 어떻게 찾아냈을까였다. 미안하다고 얘기해도 모자랄 판에 내 입에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NO. 내가 입에 담아본 NO 중 제일 힘이 없는 '노'였다. 아마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사람이 봐도 분명 '저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할 정도로 수상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또 어영부영 지나갔다.
며칠 뒤, 그 친구는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 번 더 물어봤다. 옆에는 내가 먹은 마시멜로우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다른 일본인이 서 있었다. 내 대답은 역시, no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찌질하고, 추잡한 잘못이었다. 나로 인해 반한 감정이 심해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 우연히 마주친 마시멜로 봉지를 보고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올랐다. 씁쓸한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치 없이 마시멜로우는 여전히 달콤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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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이돌 연대기
예나 지금이나 아이돌을 좋아하는 일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취미다. 물론 지금이야 어느 정도 메이저한 취미로 인정받은 추세지만 예전에는, 특히 <쇼미더머니 3> 방영 당시에는 아이돌에 대한 대중의 눈초리가 제일 야박하던 시기였다. 이미 끓을 대로 끓어넘친 레드 오션 사이에서 아이돌의 전문성은 심심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떠오르는 떡밥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아이돌들은 항상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쉴 틈 없이 치열하게 외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연예 기획사들도 멤버들에게 연기돌, 싱어송라이터, 서브보컬 등의 수식어를 붙여주면서 최대한 자신의 아이돌들이 얼마나 다재다능한지, 얼마나 전문적인지, 얼마나 체계적으로 포지션이 구성되어 있는지 어필하곤 했다.
아이돌의 팬은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열성파'다. 계정 여러 개로 음원을 24시간 스트리밍 하는 것은 기본이고, 팬싸인회를 가기 위해 앨범을 수십 장 구매하기도 한다. 집에는 응원봉과 포카 여러 장이 책장 어딘가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새로운 곡으로 컴백할 때면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응원법을 숙지하고, 음악방송 방청도 참석하는, 이를테면 팬덤의 행동대장이자 코어 같은 부류다.
두 번째는 '온건파'다. 아이돌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직 앨범까지 살 정도는 아니고, 유튜브에서 심심하면 그 아이돌의 영상을 보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정도다.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이름은 전부 꿰차고 있지만 자세한 인적 사항 (혈액형, 생일 등등)은 잘 모르는 일종의 선을 지키는 부류다. 마지막은 일반인이라고도 부르는 '머글'이다. 아이돌 노래를 알기는 하지만, 유난히 TV에 나오는 멤버 몇 명의 이름을 빼면 다른 멤버들은 무슨 역할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새로운 아이돌이 컴백할 때마다 흥얼거리는 노래가 달라지는, 분명히 있긴 하지만 언제 빠질지 모르는 일종의 허수 같은 부류다.
나 역시도 굳이 분류하자면 '머글'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아이돌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오, 예쁘다.' 정도에서 그칠 정도의 관심이 딱 최대인 그런 사람. 이런 내 마음의 문을 연 건 여자친구였다. 중소엔터테인먼트의 기적으로 떠올랐던 그룹이자, 이제는 더 이상 완전체를 볼 수 없을 그룹. 아이돌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흔히 '입덕기'라고 부르는데 나의 입덕기에는 정말 별 스토리가 없다. 어느 날 소파에 앉아서 유튜브로 여자친구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팬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뭐라도 씐 것처럼. 사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는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심지어 그 당시에는 제일 많은 팬들이 유입되는 활동기도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학교 3부작으로 부르는 <유리구슬, <오늘부터 우리는>,<시간을 달려서>를 마치고 컴백한 <너 그리고 나>의 활동이 끝난 후였다. 그것도 이미 활동은 한참 전에 끝났던 시기였다. 이런 애매한 시기에 나의 첫 아이돌 연대기는 시작됐다. 팬 카페 가입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아이돌의 세계의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우선 앨범을 사서 '인증'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서둘러 방학을 맞이해 한국에 잠시 들렀던 룸메이트에게 여자친구 앨범을 사오라고 시켰다. 포스트잇에 오늘 날짜와 팬 카페 닉네임을 쓴 뒤 앨범에 붙이고 인증샷을 찍었다. 다음으로는 여자친구에 관한 간단한 문제 몇 개가 등장했고, 마지막으로는 앞으로의 결심을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됐던 나의 아이돌 연대기는 결국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시작처럼, 마무리 역시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동안 모아둔 앨범과 사인 앨범을 모두 필리핀 친구에게 팔고 1년 뒤, 여자친구라는 그룹은 전속계약 종료로 영원히 사라지게 됐다. 아직 조금이나마 팬심이 남아있었는지 한동안은 그 소식을 듣고 상실감에 빠져 지냈다. 다행히 여자친구의 서사는 VIVIZ에서 이어진다. 멤버의 딱 절반이 모여서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소속사와 시작한 VIVIZ의 서사는 이제 시작이다. 그래서 아이돌의 팬으로 살아본 경험이 어땠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아이돌뿐만 아니라 시간과 돈을 들여서 한 번쯤은 누군가를 좋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작더라도 좋아하는 것이 하나쯤 있는 것만으로도 이 팍팍한 세상을 잠시나마 살아가게 만들어줄 여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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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잘 쉬다 가셨나요? 쉬려고 했다가 괜히 기운만 빠지셨다면 여기에 적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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