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나이키 에어포스부터 붕어빵까지

2023. 1. 24.

잘 안보이시나요?

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직업: 에디터

직업란에 에디터라고 당당하게 적을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명함에 박힌 '에디터'라는 세 글자를 보며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나 진짜, 이 일로 먹고 사는구나. 약 10년 전, 굳이 굳이 힘겹게 진학한 자사고에서 공고로 전학을 가겠다며 떼를 쓰는 애를 보던 부모님도 아마 그제서야 나와 같이 숨을 돌리지 않으셨을까 싶다. 아마 세상의 모든 직업들이 다 그렇겠지만, 에디터라는 직업이 주는 화려한 첫인상과 실생활은 영 딴판이다.

텅 빈 백지를 채워야 하는 화가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에디터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이야기를 이렇게 전달하는 게 맞는 방법인지 하루 종일을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고민하다 보면 왜 예술가들이 단명할 수밖에 없는지 어느 정도는 알게 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재난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소재 고갈'의 손을 번쩍 들어줄 자신이 있다. 아무리 세상에 널린 것이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이라지만, 그 안에서도 상품성을 가진 나름대로 알맹이가 있는 이야기를 발굴해 낸다는건 한숨만 나오는 일이다.

이 직업을 가진 지도 이제 겨우 1년하고도 반을 넘긴 애송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에디터의 장점은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인플루언서나 배우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는 것. 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에디터가 하는 일이자 장점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보고 싶었던 배우의 이야기를 1대 1로 듣는다거나, 평소 좋아하던 아티스트에게 다음 앨범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큼 스파크가 튀기는 순간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내 이야기는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셀럽들의 결혼 생활이나, 음악 취향이라면 몰라도 서울에 사는 평범한 20대 남성의 취향을 궁금해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니 조금은 슬퍼지기도 하지만, 나 역시 나와 비슷한 사람의 취향을 알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든 적이 없으니 결국 누구나 똑같다는 것이다. 언제까지고 이 직업으로 먹고 살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마음 한구석엔 언제든지 어디론가 떠나버리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 오늘도 의자에 앉는다. 현재의 머릿속만큼 하얗게 질린 워드 화면을 보며 누군지도 모르는 대상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오늘은 뭘 쓰나요?

붕어빵은 꼬리부터

봄딸기나 여름 수박 같이 계절마다 꼭 먹어야 하는 제철 과일들이 있는 것처럼, 음식에도 제철이 있는 그런 음식들이 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짙은 빨간색 천막, 식욕을 간질이는 기름진 냄새,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운 팥앙금. 겨울을 대표하는 나만의 제철 음식은 붕어빵이다. 갓 구운 뜨거운 붕어빵을 손을 데여 가면서, 뽀얀 입김을 후후 뱉으며 기름으로 번지르르한 입술을 남기고 나면 그제서야 올해도 어김없이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곤 한다.

길거리에서 단돈 천 원이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고작 천 원짜리 음식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나름대로 엄격한 평가 기준이 있는 반전의 음식이기도 하다. 붕어빵을 평가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기준은 바로 ‘꼬리’다. 꼬리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붉은 팥이 먼저 마중을 나오는지, 아니면 텅 비어 있는 붕어빵의 속내가 먼저 드러나는지에 따라 희비가 엇갈린다.

달콤한 팥을 기대하고 꼬리를 물었다가, 퍽퍽한 밀가루 맛만 느껴지면 괜히 섭섭해지기도 한다. 반대로 꼬리를 물었는데 팥의 짙은 단 맛이 혀에 먼저 닿는 순간, 추운 겨울에도 사람의 정은 아직도 따뜻하다는 걸 몸소 느낀다. 물론 겨우 천 원짜리 음식에 뭘 그렇게 바라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건 꼬리까지 팥이 가득 차 있는 붕어빵을 먹을 때의 행복을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팥이 가득 찬 붕어빵 집을 발견하면 그 해 겨울 내내 그 집에서만 파는 붕어빵을 사 먹는다. 겨울을 보내는 소소한 재미이기도 하다.

방구석에서도 온갖 음식들이 배달 가능한 지금이야 마음만 먹으면 여름에도 붕어빵을 먹을 수 있겠지만, 여름 붕어빵과 겨울 붕어빵이 주는 이미지는 이미 머릿속에서부터 다르다. 과일에는 제철이 있는 것처럼 음식에도 제철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제철 행복이 있다. 겨울에 먹는 붕어빵이 가장 맛있는 것처럼, 이번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다들 조금씩은 맛보는 계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붕어빵을 산다.

회색 도시 속 그녀가 신은 민트색 나이키 슈즈

그날은 브랜드 이름도 몰랐던 뉴발란스 짭을 신고 간 날이었다. 굳이 과실을 따지자면, 브랜드 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우리 부모님의 비율이 3 정도, 그리고 그동안 신던 칙칙한 회색 신발 대신 깔끔한 새 신발을 신는다는 생각에 마냥 신나 버린 나의 잘못이 7정도. 그 신발이 짭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아마 체육시간이었을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아이들의 비웃음을 샀던 그날 이후, 그냥 신고만 다니는 '신발'이라는 물건이 신발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하게 됐다.

그로부터 10년 후, 지금 내가 신고 다니는 신발은 크림에서 구매한 흰검 나이키 에어포스 운동화다. 에어포스를 겨우 하루 신고 버린다는 닥터 드레 급은 아니지만, 나 역시 나름 에어포스 두 족을 보유한 한 명의 팬이기도 하다. 빈지노의 노래 <NIKE SHOES>를 들을 때만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내가 그 노래에 등장하는 나이키 신발을 신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성인이 되고 3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내 돈으로 나이키 에어포스 신발을 살 때의 그 짜릿함이란. 아마 그때서야 빈지노가 찬양하는 <NIKE SHOES> 가사 속의 여자가 어떤 모습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치열하고 바쁜 잿빛 도시 속에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잃지 않은 채 바쁜 시간을 쪼개 러닝을 즐기는 스포티한 스타일의 인물. 아마 그때부터 누군가가 이상형을 묻는다면, 나도 모르게 그 노래를 들으며 그렸던 이상형의 모습을 은연중에 흘리곤 했던 것 같다. 나이키 신발에 질끈 묶은 머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푹 눌러쓴 불캡까지.

빈지노가 불렀던 그 '민트색 나이키 슈즈'의 정체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 두발에 신겨있는 신발의 정체는 분명하다. 나이키 에어포스. 뭔가 새로운 신발을 살까 고민하지만 결국 끝까지 남는 건 이 시리즈다. 애매한 키를 보완할 수 있는 적당히 높은 굽,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의 파도에도 거뜬한 깔끔한 디자인. 뭐 하나 부족한 구석이 없다. 너무 티 나게 멋부리지 않으면서, 적당히 멋을 부릴 수 있는 마음을 백번 헤아린 나이키의 스테디 셀러답다.

신발은 패션의 화룡점정 같은 포지션이다. 어딘가 부족한 2%를 채워주는 느낌이랄까. 어딘가 밋밋한 코디에 깔끔한 신발 하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것처럼, 좀 이상한 말이지만 신발은 신발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반대로 신발 하나를 위해 모든 코디를 맞추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는 닥터마틴의 가죽 구두가 그런 신발이다. 분명 예쁜 신발이지만, 이 아이를 위해 나의 모든 패션을 전부 바쳐야 한다는 그런 아우라를 풍기는 신발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신어봐야겠다. 이상으로 설 연휴 동안 헬스장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은 인간의 상당히 무의미한 고민을 마칩니다.

트로이 시반이라는 아티스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취향마저 닮게 된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 얄궂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취향까지 닮아가게 만든다. 만약 주위에 생전 먹지도 않던 파스타를 찾거나 정장만 입던 사람이 구두 대신 이지 부스트를 신고 오는 것처럼 갑자기 뜬금없이 스타일이 변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을까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도 무방하다.

내가 트로이 시반이라는 가수를 알게 된 계기 역시 시시하고 하찮고 흔한, 이야기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그 누나의 프로필 뮤직은 항상 트로이 시반의 노래였다. 그 말은 그동안 순도 100% 힙합으로만 채워져있던 나의 플레이 리스트도 겸허하게 리뉴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들었던 음악과 트로이 시반의 음악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속도다. 조금이라도 박자가 느려지거나, BPM이 낮아지는 걸 병적으로 견딜 수 없는 나에게 트로이 시반은 잘 우린 차 하나를 억지로 무릎까지 꿇은 채 마시는 듯한 고역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탄산이 자글자글한 콜라 같은 음료인데 말이지.

그 뒤의 이야기는 뻔하다. 내 취향이 아닌 음악을 듣다 보니, 점점 더 그 사람이 좋아지게 되었다는 그런 흔한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인성이 파탄 난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무슨 일을 해도 다 호감으로 작용하기 마련이긴 하다. 어이없게도 그 누나가 아닌, 트로이 시반과의 인연은 더 깊어져 결국 나는 트로이 시반의 가사를 영어 발표 수업 때 낭독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래봤자 결국 DNA에 새겨진 음악 취향은 어쩔 수 없었는지, 내 플레이 리스트는 결국 원상 복귀되었고 그 누나와의 인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 일이 원래 그런 법이다. 그 일이 지난 후 남은 건 플레이 리스트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트로이 시반의 'Fools'라는 노래였다.

트로이 시반, 라우브 같은 아티스트들의 음악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평소 같으면 플레이 리스트에서 쳐다도 보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하는 순간에 그 음악이 땡긴다는 점이다. 그런 순간을 만약 경험한 적이 있다면, 앞뒤 재지 말고 무조건 그 자리에서 그 음악을 들어야 한다. 적절한 비유가 이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 미안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어디가 가려웠는지도 모른 채 끙끙 앓다가 마침내 가려운 원인을 찾아 시원하게 벅벅 긁는듯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트로이 시반의 노래를 듣다가 문득 내가 느꼈던 이런 감정을, 그 누나는 느낀 적이 있을지 갑자기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