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쉽니다.
뉴스레터 이름으로 맞는지 순간 고민했지만, 결국 이 제목이 됐습니다. 사실, 거창한 의미는 없습니다.
이 뉴스레터를 쓰는 저도, 이 뉴스레터를 읽고 계신 여러분도 이 시간만큼은 쉬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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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가 어떻게 되세요?
MBTI라는 것이 인기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일단 '트렌드 팔로워'도 모자라 아예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트렌드 반항아'인 나조차도 이런 사실을 알 정도면 정말 어지간히 인기인 트렌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들어진지도 이제 10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성격 유형 검사가 갑자기 인기를 끈 배경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알고 싶다는 심리가 적절히 반영된 트렌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나 자신만큼이나 다른 사람을 참 잘 알고 싶어 한다. (아마도) 어디까지나 너무 과몰입하지 않는다면 MBTI는 나같이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참 좋은 수단이 된다. 어색한 첫 만남의 자리를 그나마 녹여줄 스몰 토크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나라는 사람의 길고 긴 지루한 인생사를 친절히 나열해 줄 필요 없이 MBTI 하나만으로 내가 누구인지 바로 설명이 가능하다.
어딘가에서 읽은 흥미로운 내용인데, MBTI를 포함한 각종 유형 테스트들이 최근 들어 인기를 얻고 있는 배경에는 사실 나만큼이나 남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빚어낸 현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의 MBTI가 ENFP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인생사를 훑어볼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좋아하고, 재기 발랄 하고,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겠군.' 종종 그런 추측들이 오히려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되려 있지만, 어쨌든 타인을 이해하고 싶어서 이런 검사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건 왠지 모르게 가슴 따뜻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다들 삭막해 보이는 콘크리트 빛 가면들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더 나를 알고, 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걸 생각하면 조금은 다들 귀엽게도 느껴진다.
참고로 나의 MBTI는 ISTJ다. 사실 INFJ였지만,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매번 갈등하는 인프제는 결국 거친 사회의 풍파를 견뎌내지 못했다. 내 MBTI를 밝혔을 때의 반응은 두 가지. 하나는 '역시나 그랬군'이라는 암묵적인 끄덕임이 담긴 시선을 보내거나, 또 하나는 '무슨 저런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있지?'라며 신기하게 쳐다보는 눈빛이다. O형은 알파벳 O처럼 둥글둥글해서 성격이 좋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혈액형 유형론에 비하면 MBTI는 그나마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이런 순간이 올 때마다 MBTI의 신뢰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걸 마음 한 편에 품고 삼아도, 인터넷에서 본 각 MBTI 유형별 특성이 몇 개 얻어걸리는 순간 나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쓴 안경이 도리어 '색안경'이 되는 상황들을 볼 때마다 역시나 현실은 참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사람이라는 존재가 참 정의 내리기 어렵다는 뜻일 수도. 어느 오래된 노랫말의 가사처럼,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겠느냐만 결국 세상살이 그렇듯 우리는 항상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산다. MBTI가 없었을 과거에는 더더욱 그랬고 VR과 메타버스라는 새로운 세계가 등장하는 미래에도 이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짧게는 60년, 길게는 80년 가까이 살 수 있는 이 인생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의 과업은 아마도 '나라는 존재의 탐구'가 아닐까 싶다. 아직 인생을 논하기엔 썩 많은 나이도, 그렇다고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지만. 원래 그런 거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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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혼자 삽니다.
자취 경력 2년 차. 나 혼자 산다는 건 꽤나 장점이 많은 삶이다. 물론 엄마의 잔소리에서 사회적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도, 어렸을 때라면 어림도 없을 배달음식을 아침으로 시켜 먹을 수 있는 삶을 즐길 수 있다는 점도 그런 장점들 중 하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장점은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밖에서 얼굴 붉힐 일이 있더라도 집에 들어와 시원한 에어컨을 켜고 방금 도착한 따끈따끈한 배달 음식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넷플릭스를 보는 삶이라면 인생도 어쩌면 조금은 살아볼 만할지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이 모든 일들이 어디까지나 '혼자'라는 점이다. 혼자는 생각보다 적적하다. 그래서인지 집에 들어서는 순간 늘 밥친구를 부르는 편이다. 밥친구라고 해봤자 오래된 LG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예능 프로그램들이 전부지만. 아, 최근에는 아이패드라는 새로운 친구가 하나 더 생겼다. 아무튼 이런 밥친구들과 함께라면 아무리 맛없는 소위 '밥경찰'을 자부하는 반찬들과도, 건강한 맛이 일품인 닭가슴살 식단들도 아무 문제없다.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먹느냐 못지않게 중요한 논제가 바로, 얼마나 좋은 사람들과 먹느냐이다. 학교 급식 이후로 이미 사람들과 밥 먹는 일에 담을 쌓은 나로는 이만한 친구들이 없다.
웃기지만 나름대로 밥친구를 선정하는 까다로운 기준까지 마련해 뒀다. 우선 밥을 먹을 때는 무조건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둔다. 적어도 밥을 먹는 이 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고난과 번뇌에 휩싸이지 않고 온전히 입 안에 들어있는 가공식품의 맛을 마구 음미하고 싶은 마음에서 들인 버릇이다. 그래서 가장 자주 만나는 밥친구는 <런닝맨>이다. 중학생 때 보던 예능 프로그램을 다 큰 시커먼 어른이 돼서도 볼 수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감사한 일이다. 그 왜, 어린 시절에 보던 만화영화를 다 큰 어른이 되어서 보면 괜히 마음이 뭉클한 것처럼.
<런닝맨>의 유일한 단점은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1시간 반이면 한 에피소드가 끝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전혀 이상할 일이 없겠지만, 주말에 약속을 잡아본 적이 까마득한 준 히키코모리 같은 나에게 일주일은 너무 길다. 그래서 찾은 해법은 예전 예능을 돌려 보는 것이다.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고 했나. <무한도전>은 그렇게 나의 순정이 되었다. 가수 안예은 씨는 무한도전의 한 장면만 보고도 어떤 에피소드인지, 어떤 이야기인지 알아맞힐 수 있는 개인기가 있다고 했다.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 역시 무도 키드로서 웬만한 에피소드들은 한 번쯤은 봤던 것 같다. 오늘도 변함없이 성질내는 명수 아저씨를 보며, 준하 아저씨의 뒤통수를 치는 홍철 아저씨를 보며, 가끔씩 피식하게 만드는 길 아저씨를 보며 나 역시 오늘의 하루를 마무리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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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에디터 2편
본의 아니게 지난 레터를 통해 예비 에디터들의 꿈을 꺾은 건 아닌가 싶어 2편을 준비했다. 기대해도 좋다. 이번 레터는 그래도 꽤나 긍정적이고 밝은 해피엔딩이니까. 아마 몇 달 전이었을까, 브랜드에서 진행하고 있는 재능기부 프로젝트를 위해 한 재단의 캠페이너들과 인터뷰를 하게 된 날이었다. 긴장해서 속이 울렁거렸던 첫 인터뷰를 마친 후, 그동안 해왔던 몇 번의 대면 인터뷰를 통해 단련된 덕분에 더 이상 인터뷰는 내가 피하고 싶은 업무가 아닌 그냥 그저 그런 업무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낯 가려서 '대면 인터뷰를 못하는 에디터'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를 달고 살 수는 없으니까. 왜 내 DNA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오랜 친구처럼 얘기할 수 있는 '인싸'의 DNA가 흐르지 않는 것인가. 한탄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이번에 맡은 인터뷰이는 총 3명. 단체도 아닌 개인 인터뷰인지라 30개에 달하는 인터뷰 질문을 만드느라 골머리 좀 앓았다. 인터뷰를 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은 말 수가 없는 사람도, 슈퍼스타도 아닌 이미 다양한 채널을 통해 이미 자기의 이야기를 많이 해왔던 사람이다. 새로운 것을 발굴해 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아무리 이전 인터뷰들을 뒤져봐도, 도저히 신선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이 일을 하는데 시간이 내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 내 노션은 그저 그런 상투적인 질문들만 냅다 적힌 페이지들로만 가득했다. 여차저차 인터뷰 질문 준비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현장으로 향하는 길에서도 머릿속은 영 착잡했다.
누군가 했던 말 중에 '촉'이라는 건 일생에서 경험한 모든 데이터들이 축적된 매우 과학적인 근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촉이 왔다. 아무래도 이번 콘텐츠는 망한 것 같다는 촉. 터덜 터덜. 현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이미 먼 나의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했었는지, 영 힘을 쓰지 못했다. 사진 촬영이 끝나면 본격적인 나의 차례다. 첫 번째 인터뷰를 마쳤다. 나쁘지 않았다. 두 번째 인터뷰까지 마쳤다. 예상보다 좋은 답변들이 나왔다. 그렇게 부푼 기대감을 안고 세 번째 인터뷰이를 만났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청년보다는 소년 같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우리의 벽을 허물어줄 주제는 생각보다 빨리 등장했다. 다행히 우리 사이에는 힙합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었고, 어느새 인터뷰가 아닌 사담으로 빠진 우리의 대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되어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자, 세 번째 인터뷰이가 나를 보며 '고맙습니다, 선생님.'이라는 말을 건넸다. 선생님이라니, 누가요? 제가요? 틈만 나면 야자를 도망가서 빗자루로 맞던 나였는데 불과 10년 만에 나는 누군가의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이 인터뷰가 하기 싫어 온갖 게으름을 피우던 내가, 이런 사람들까지 인터뷰를 해야 하냐며 잠시 오만해졌던 내가. 그 인터뷰이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다며 연신 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책임감이라는 감정이 가슴 저 멀리서 살며시 머리를 들었다. 내가 관성적으로 해오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회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갑자기 대학교 시절, 저널리즘 수업을 가르치던 교수 님이 가장 처음으로 가르쳤던 말이 떠올랐다. 글에서 가장 중요한 건 'by line', 그러니까 누가 쓴 글인지 표기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글의 출처를 가리기 위함 뿐만 아니라, 글을 쓴 사람으로서 그 글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갑자기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 글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지고 있나, 과연 내가 쓴 글에 최선을 다하고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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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게 죽는 법
어느 영화에선가였나, 사람이 죽기 전에 가장 많이 보는 풍경이 '천장'이라는 대사가 떠올랐다. 문제는 그 생각을 떠올린 장소가 다름 아닌 어깨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누워있던 물리치료실의 침대였다는 점이다. 이것이 생각이 많은 N의 특징인가 싶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이 떠올린 그 대사를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조금 변형시킨다면, 아마 우리는 평생 동안 모니터를 주변 사람의 얼굴보다 훨씬, 훨씬 더 많이 보지 않을까 싶다. 오늘 하루만 해도 당장 8시간 동안 일하면서 보는 게 컴퓨터 모니터고, 집에 와서도 핸드폰의 그 손바닥만 한 작은 화면에 뭐라도 숨겨져 있는 것처럼 눈이 빠지게, 한 장면이라도 놓칠 새라 뚫어지게 들여다본다. 이러다 정말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장면이 따스한 가족의 손길이 아닌, 차가운 금속의 AI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종 직전의 순간에도, 잠깐! 이것만 보고. 이러지는 아닐까 걱정된다.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에도 파란 불빛에 눈을 혹사시키고 있다보면 '이제는 정말 그만 봐야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수요도 생산도 뭐든지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는 뭐라도 보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 미칠 것 같단 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는 소리였지만, 어렸을 때 나의 꿈은 '순직'이었다. <명탐정 코난>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 단어의 뜻을 알게 된 후부터, 이미 나는 나의 꿈을 정하기도 전에 나의 죽음을 미리 정하게 됐다. 순직. 정확히 말하자면 어떤 의미 있는 일, 그러니까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거나 스파이더맨의 그 유명한 열차 씬처럼 이 시대의 마지막 영웅 같은 모습으로 죽고 싶었다. 부모님에게 아주 자랑스럽게 생글거리는 얼굴로 '엄마, 내 꿈은 '순직'이야'를 말하던 초등학생 아들을 보는 부모님의 심정이란 어땠을지.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지금, 내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은 그저 '아프지 않고, 적당히 때 되면 가는 것'이다. 괜히 호상이라는 말이 있을까.
당연한 소리겠지만, 나는 죽음이 무섭다. 정확히는 죽음을 상상했을 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그 캄캄한 이미지와, 내가 죽고 나서 어떤 존재가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불확실한 미래가 무섭다. 모 애니의 제목처럼 형체도 없는 슬라임이 되지는 않을까. 아니면 인간도 아닌 소가 되어 평생 남의 밭이나 갈면서 살아야 하진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글을 쓰는 에디터라는 직업을 선택한 건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뭐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 그래도 죽고 나서도 유령처럼 이 사이버 세상을 떠돌아다닐 글들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죽고 난 후에 이 글이 나의 모든 것처럼 취급받는 건 조금 싫지만. 그래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순순히 따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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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써봤습니다. 잘 쉬다 가셨나요? 쉬려고 했다가 괜히 기운만 빠지셨다면 여기에 적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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